
김정일의 사망 소식에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 진중권 선생이 트위터에 썼듯,
이건 '진심'이다. 연좌제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슬픈 거다.
도대체 왜?
왜 진심으로 우는걸까. 뭐가 슬픈걸까. 서민들의 삶이란건 아예 안중에도 없던
세습 독재자의 죽음이 개개인의 감성에 이토록 강렬한 영향을 주는건 도대체 무얼까.
이들이 진심으로 슬퍼하는건,
전여오크가 진심으로 노무현을 끝까지 까대는 것,
조갑제가 진심을 다해 수꼴 이외의 모든 이들을 좌빨로 모는 것,
조중동 기자들이 진심으로 왜곡보도를 통해 괴담을 양산하는 것,
시장 아주머니들이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것과
어딘가 모르게 같은 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전여오크나 조갑제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우리와 사실상 같은 욕망을 갖고 있는
<무지몽매 보수>들이 진심으로 보수가 된 그 이유를 알아야
그들과의 최소한의 힘겨루기를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을게다.
한번 디벼보자.
그들이 그러한 진심을 갖게 된 이유.
1. 밀그램의 복종 실험
스탠리 밀그램이라는 아저씨가 있다.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그의 실험은 소위 <권위>라는 것이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위 그림을 보자. E는 실험자, T가 피험자, L은 훼이크 피험자다.
실험자와 피험자는 같이 있고, 훼이크 피험자인 L은 벽에 가려있으며, 서로 소리만 들을 수 있다.
밀그램은 T에게 "L에게 문제를 내고 못맞추면 전기 충격을 줘서 벌을 주라."고 한다.
전기충격은 단계별로 줄 수 있으며, 문제를 계속 못맞추면 15V에서 450V까지, 15V씩 점점 늘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 실험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저희가 지겠습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450V까지 올리면,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이 실험을 처음 듣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몇명의 사람이 몇V까지 전압을 올렸을까?
밀그램은 실험 전, 450V까지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고,
가장 높이 올리는 사람이 몇 V까지 올릴지, 개인별 상한선의 분포가 궁금했다.
결과는? 65%의 피험자가 450V까지 올렸다.
벽 너머에 있는 L이 존나 소리지르고 굴러다니고 개 지랄이 나도,
분명히 매우 위험한 전압이라고 주지했음에도 불구하고
65%의 사람들은 450V까지 전기충격의 전압을 올렸다.
물론, 실제로 그 전기충격기는 완전히 가짜였으며,
안에서 소리지르고 지랄하던 L도 연기자였다.그럼에도 불구, 이 충격적 결과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후속 연구로 이어졌다.
그 중 하나는, 이런 식이다. 담당 의사가 간호사에게, 치사량의 약물 주사를 처방한다.
물론 주사를 놓지는 못하도록, 주사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지했다. 환자 차트도 없는 환자 차트.
암튼 그 처방대로 주사하면 환자는 100% 죽고, 그건 모든 간호사들이 알고 있을만큼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 50% 이상의 간호사가 그 치사량의 약물을 주사기에 담았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실험이, 스탠포드대 모의 감옥 실험.

2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실험.
일반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피험자 집단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간수, 한 그룹은 수감자 역할을 맡는다.
2주로 계획됐던 이 실험은, 너무 빡세져서 6일만에 끝난다.
2차대전 포로수용소에서 가해지던 잔혹행위가 그대로 재현됐다고도 한다.
물론 피험자들은 그 잔혹행위를 한번도 배우거나 들어본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인간의 잔인함? 성악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악마성?
아니다. 필자가 좀 지겨울 정도로 늘 얘기하는 바로 그 얘기.
<정상>이라는거다. 일반적인 인간들이 흰 가운 입은 사람으로 부터 "제가 다 책임 질게요"라는 말 한마디를
들은 것 만으로도 상식적이라 생각되는 도덕성과 이성을 상당부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완장>의식, 특권의식이 모두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라는 것.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순사보다 더 악랄했다던 조선인 앞잡이들도,
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거나, 도덕적으로 비판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가 애초에 도덕심이 없는 짐승같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거다.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 어떤 권위가 <책임>을 대리하겠다는 환경만 주어지면
그때 부터 벌어지는 일은 도덕이나 가치관의 차원이 아닌거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악랄해질 수 있다.
실제로 밀그램의 실험은 이후 전법 재판의 판결에 영향을 끼쳤다.
2. 갈등의 반복, 그리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모두가 들어봤을테니 대충 넘어가겠다.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존나 불균형한 힘싸움이라는 점이다.
아들은 힘이 존나 없는데 그걸 모른다. 꼭두새벽에 울고 칭얼거리는 것 말고는 무기도 없다.
그러므로 이건 무조건 패배하는 싸움이다. 자신의 페니스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싸움과 패배.
이 싸움의 결과로 인간은 한걸음 성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수는 <동일화>라는 작업을 병행하게 된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만이 남자로서의 <성장> 모델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를 <동일화>하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체크해 나가게 된다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어린시절 많은 시간을 부친과 보낼 수 있었던 남자들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습관을 상당히 닮아간다. 웃음소리, 전화받을 때의 말투, 여자를 대하는 법, 밥먹을 때의 습관 등등.
그리고 이러한 대략적인 흐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권력을 지닌자와 그렇지 못한자 사이에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아주 쉬운 예로, 군대를 생각해보자.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의 선후배 사이도 유사하다.
다들 기억할거다. 고참이나 선배 욕 존나 하는 새끼들이
막상 지가 고참이나 선배 되면 똑같이 한다.
그런데, 그냥 똑같이 하는게 아니라, 진짜 디테일하게 똑같이 한다.
옛날에 욕하던 그 고참이 쓰던 단어,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다거나,
그 고참만 시키던 가혹행위, 그 고참만 때리던 부위를 그대로 하는 거.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케이스가 정말 적지 않다. 어쩌다 한번이라고 하기에는 꽤 익숙한 상황.
좀 더 확장해보자.
민주당이 여당이 됐을 때, 개별 의원들의 행태.
난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TV토론회에서 이름은 기억안나는 어떤 야당 의원이 이렇게 말하던 순간.
"이 사람아, 내가 여당일때도 그렇게는 안했어"
그렇게 했는지 안했는지 진위 여부를 떠나서,
저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호남 한나라당>이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게 아니다
구조적이고 이념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로 그들이 여당일 때 보였던 행위들이 국민들에게 준 인상.
"뭐 얼추 비슷하네"
좀 가혹한 얘기일 수도 있겠다만, 만년 야당하던 민주당 의원들에게 있어
<여당의원>의 롤모델은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밖에 없었던거다.
입장이 바뀐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그냥 보고 배운대로, 그 외에는 생각나는게 없는거다.
어느 한쪽과 다른 한쪽의 권력갈등이 있다면,
그 권력을 사용하는 매뉴얼은 <기성 권력>의 행태 그 자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 그렇게 존나 듣기 싫던 말을 읊조리게 되는 거다.
"요즘 어린 것들은....."
"우리 때는 그래도....."
결론적으로, 기성권력과 그 나머지라는 이원화된 권력구조의 갈등,
그러니까 세대갈등, 부모자식 갈등, 선후배 및 고참쫄병, 여야, 임원과 직원의 갈등은
뭔가 특별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이상, 시지푸스처럼 무한히 반복된다.
물론, 그 특별한 단계를 찾아보자는 얘기다.
3. 진심의 기원

구스타프 쿠르베. 세상의 기원. 1866년. 오르세 미술관.
큰 그림을 그려보자. 밀그램의 복종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연결고리.
기본적으로 어떤 <권력>을 상정해보자. 이 권력은 실질적인 권력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권력일 수도 있다. 뭐 어차피 그 둘은 갖다. 상징적인 권력은 당분간 실질적인 권력을 지니니까.
그리고 그 권력은 독점성을 지닌다. 이건 뭐 당연하다. 권력이란 기본적으로 상호배타적이다.
그렇다면 피지배층이 발생한다. 권력의 여집합. 권력이 없는 모두들.
권력이 없는 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친권력, 반권력.
친권력 그룹은 밀그램의 복종기재를 타게 된다. 나는 그 권력을 신뢰하므로
내가 하는 행동은 그들의 바램을 따른다. 자연스럽게 내 행동의 결과는 권력의 책임이다.
그 권력이 신자유주의가 우리모두를 살린댄다. 그럼 FTA 존나 찬성하는거다.
그 권력이 위계질서가 중요하댄다. 그러면 존내 선배한테 굽신거리고 후배는 까는거다.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 동상의 모가지를 동강내버리는 종교인들의 행위.
기본적 같은 기재다. 우주유일의 신이 우상숭배 하지 말랬어. 그럼 우상 다 깨부수는거다.
씨바. 지들 신이 언제 엄한 동상 모가지 자르랬다고.
즉, 이건 권력자들이 '시켜서' 뿐만 아니라 '지들이 알아서'라는 시스템이 공존하게 된다는 점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셈이다. 권력 자체에는 없던 극단성은 이렇게 친권력적 피지배층의
자발적 복종기재에 의해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밀그램이 갑자기 "야 씨바 450V는 위험하대니까? 저새끼 죽으면 니가 책임져"이래버리면
피험자가 존나 너무 허탈하게 좆돼버린다. 책임은 니가 진다매? 씨바 책임은 니가 진다매?
자연스럽게 피지배층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강한 권력을 오히려 바라게 되는 거다.
내가 책임을 안져야되니까. 내 행동이 <누가 옳대니까>가 아니라 도덕, 이념, 논리, 가치의 측면에서 검토되어지는 상황이 돼버리면 지금까지의 내 삶이 부정당해버리니까.
그러니까 점점 더 강한 권력이 점점 더 큰 책임을 져주길 바란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유. 존나 꼴보수적인 목사가 생각 트인 목사보다 인기가 좋은 이유.
존나 빡세게 굴리던 고참이 제대할 때 더 많은 쫄따구들이 아쉬워하는 이유.
이 과정에서, 친권력층이 차근차근 본인의 나와바리를 키워나가며
그 권력의 속성을 학습한다. 그리고 그 속성의 조합이 <권력체>를 구성한다고 믿게 된다.
그들이 보아온 권력의 속성, 권력자의 롤모델은 지금의 권력자 밖에 없으니까.
아버지가 지닌 힘은, 그냥 그 힘 자체에 있지 아버지의 습관과는 무관하지만,
작은 습관과 버릇을 따라하는 어린 아들처럼
새벽까지 야근하고 룸싸롱가서 새벽 5시까지 달리고, 다음날 7시반에 출근하는 상무님의 근면함,
내무실에서는 존나 잘해주면서도, 훈련나가서는 긴장하라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달고사는 소대장의 카리스마,
상대 후보의 사적인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면, 한달 굶은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정치9단 4선의원의 노련미.
그 속성의 조합이, 권력 이양과 연결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미신>의 기재와 유사하다.
미신이라고 무시할게 아니라, 생명력이 존나 끈질기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1세기에 길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면서도,
우리는 제주도 가서 아들 낳겠답시고 하루방 코를 만지지 않는가.
돼지꿈꾸면 로또 사고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겐 <진심>인 셈이다.
수많은 시간동안 켜켜이 재워지면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생존 본능을 통해
받아들이고, 더 오바하고, 그걸 유지하고 이어 나가면서 만들어지는 진심.
그게 뒤집어지면 내 모든게 무너지기 때문에 더욱 더 악착 같이 믿게 되는 그 진심.
그건,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 자식이 실종됐을 때,
상식적으로 생존 확률이 0%에 가깝더라도
자식의 방과 물건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늘도 내일도 자식의 소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거다.
그게 뒤집어지면, 내 삶의 근간이 흔들리니까.
그러니까 난 그걸 뒤집지 못함은 물론,
절대 뒤집히지 않도록 오히려 더 강한 힘을 넣게 된다.
여기서 씨바 존나 짜증나는건 뭐냐면
권력자들은 이걸 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과, 권력을 지지하는 피지배층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라는걸.
4. 삶에 대한 의지

실종된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통.
하지만 그 고통을 가슴에 묻고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넘기는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지난 글 - Stroop과 Heuristic- 에서 언급했듯,
결국 우리는 나와 내 가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정치적 스탠스를 정하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환상도, 미신도, 권력도,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데에 방해가 될 때
산산히 깨어지게 돼있다.
돼지 꿈 꾸고 로또를 사고, 하루방 코를 만지더라도,
수백만원짜리 살풀이 굿을 하라고 하면 한순간에 사기꾼 점쟁이가 되듯이.
맑스가 말한 <사회 체제가 더 이상 그 사회의 생산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저해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던 말.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 사회 체제가 구성원 대다수의 삶을 지탱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때. 그 체제는 깨진다.
그들은 진심이다. 김정일의 죽음에 오열하는 아지매.
박근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할매.
아들의 딴지스 활동을 걱정하는 울 어머니 아버지.
우리는 최소한, 그 권력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지
어떻게든 알게 된 사람들이다.
최소한, 우리와 그들의 등에 어떤 새끼가 어떤 빨대를 꽂아놓고 어떻게 쪽쪽 빨아쳐먹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살아내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민주당 병신들이 한나라당과 싸우는 것이 아닌,
우리네가 저네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방식이다.
끝.
PS. 사실 <반권력 그룹>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영향을 받는다는걸 앞부분에는 썼는데, 뒷부분엔 그걸 뺐다.
논점 일탈을 막기위한 조치였고, 이는 다른 글을 통해 디벼보겠다.
PS2. 새벽에 쓰다보니 좀 쎈치해져서 감상적이 된거 같아 오글거린다만, 뭐 틀린말은 아니잖아 씨바.
PS3. 전여오크와 조갑제는 개나 줘버리자는 말을 써놓고 보니, 눈앞에서 자고 있는 개, 춘심이가 좀 걸린다. 미안해 춘심아. 너 준다는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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